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자생한방병원 문을 밀고 은발의 한 서양 노신사가 들어섰다. 광합성에 필요한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 198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로버트 후버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장이다.

서양과학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한국의 전통의학 현장을 찾는 건 드문 일이다. 후버 소장은 이날 수술로도 완치가 쉽지 않은 디스크나 허리 통증에 쓰이는 한약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단순한 흥미 차원이 아니라 한의사들과 함께 한약 성분이 화학적으로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논의했다고 한다.

후버 소장처럼 한의학에 관심을 갖는 서양과학자, 서양의학자가 늘고 있다. 관심을 넘어 아예 공동연구에까지 나선다. 비방(秘方) 대신 논문을 택하는 등 국내 한의학계가 구태를 벗어 던지고 과감하게 변하고 있는 덕분이다.

'과정'에 눈뜬 한의학

미국 전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척추센터를 운영하는 시카고 러시대병원 의료진도 최근 자생한방병원에 다녀갔다. 한의학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 러시대병원 의료진은 미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아 침술과 한약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동연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서양의학이나 약으로 치료하지 못한 질병을 고칠 열쇠를 한의학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다. 이들은 골관절 치료에 써온 한약(청파전)이 연골을 보호하는 메커니즘을 실험을 통해 입증한 자생한방병원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서 접하고 한의학의 효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의학이 서양의학자나 서양의학에 기반한 국내 양의사들에게 외면 받아온 가장 큰 이유는 '결과'가 있어도 '과정'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한의원이 '비방'이라며 치료 원리나 약 성분 등을 정확히 공개하지 않은 채 효과만 내세워온 게 사실이다. 논리적 근거를 중요하게 여기는 서양의학 특성상 양의사들이 한의학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의학의 치료 원리와 한약 성분 등을 서양의학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밝혀보려는 움직임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비방으로 쓰던 청파전을 서울대와 이화여대 과학자들에게 공개해 성분과 작용 메커니즘을 밝혀 국내외 학계에 발표한 자생한방병원이 좋은 예다. 신준식 자생한방병원 이사장은 "주로 임상으로만 확인했던 한약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는 게 가장 큰 의미"라고 말했다.

신경외과+한방내과

강동경희대병원 중풍ㆍ뇌질환센터는 최근 의미 있는 연구논문 2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동맥 안쪽 벽이 약하거나 압력이 증가해 동맥이 확장되거나 변형되는 동맥류는 수술로 치료하고 나면 일부 환자들에게서 혈관이 당겨지면서(연축) 손발이 뻣뻣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뾰족한 치료법이 없어 환자는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강동경희대병원 중풍ㆍ뇌질환센터에서 이런 환자들을 모아 팔다리에 침을 놓은 결과 증상이 눈에 띄게 나아진 것을 확인했다. 또 파킨슨병으로 약을 먹던 환자들에게도 두 달 동안 머리와 팔다리에 침을 놓았다. 그 결과 우울증이나 운동상태 등의 증상이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연구논문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신경외과와 한방내과가 함께 진료하는 이 병원의 독특한 시스템 덕분이다. 서양의학으로 해결이 쉽지 않은 증상에 대해 한방 치료를 시도하고, 양의사와 한의사가 함께 한방의 치료 효과를 서양의학의 관점에서 평가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고창남 중풍ㆍ뇌질환센터장은 "전이암이나 류머티스질환 등 완치가 어려운 병은 특히 한방과 양방 양쪽의 관점으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며 "이번 연구 후속도 올 하반기에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의학 따라잡는 한의학

지금까지 한의학 강국 하면 다들 중국을 떠올렸다. 하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달 대전에서는 국제표준화기구(ISO) TC249 총회가 열렸다. TC249는 전통의학 분야 국제표준을 만드는 ISO 협의체다. 미국과 중국, 일본, 독일 등 14개국 160여명의 전통의학자들이 참가한 총회에서 열띤 논의 끝에 국제표준 24건이 통과됐다. 그 중 진단기기(전침기, 설진기, 맥진기)와 침(이침, 피내침), 뜸, 약탕기 등 7건이 한국 한의학자들이 제안한 기술이다. 앞으로 외국 전통의학자들이 이 7가지 기기를 만들거나 사용할 때는 한국 기술을 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한의학 수출 시장 확대도 이어질 수도 있다.

중국이 통과시킨 기술이 8건이었으니 국내 한의학 수준이 중의학에 별로 밀리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총회에 참가한 최승훈 한국한의학연구원장은 "침과 진단기기는 중국보다 우리가 확실히 앞서 있다"며 "이번 국제표준 통과는 세계 여러 나라 전통의학자들이 이를 인정했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한방치료를 받은 외국인은 9,889명. 2010년 2,143명보다 4배 이상 늘었다. 복지부 당국자는 "한의학을 서양의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분야로 여기는 외뮌括？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의사들의 학술지 논문, 국제학회 발표가 늘면서 한의학이 점점 과학화하고 있는 추세가 이에 적잖이 기여하고 있다.